중간쯤
아이디어 상태
🌿 성장 중 (구체화 단계)어제 화요일 늦은 오후, 마지막 수업이 끝난 빈 강의실에서 출석부를 덮으려는데 학생 하나가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서평 초안을 지금 내도 되느냐고, 마감은 남았는데 첫 문장만 자꾸 고치게 된다고 했습니다. 휴대폰 화면을 내미는 학생 앞에서 나는 문장을 읽기보다 그날 세 분반에서 비슷한 질문을 몇 번 들었는지 먼저 헤아렸습니다. 주제를 바꿔도 되는지, 이렇게 시작해도 되는지, 아직 초안인데 봐도 되는지.
나는 이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다.
고쳐야 할 말은 금방 떠올랐습니다. 많다는 말을 지우고 그 생각이 무엇인지 쓰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한 학기의 가운데쯤에 모여 있는 학생들의 망설임을 다시 듣는 일이 그 문장을 고치는 일보다 조금 더 피곤했습니다. 한참을 화면만 보다가 다음 문장을 먼저 써 보라고 했고, 학생은 휴대폰을 뒤집어 쥐었습니다.
학생이 돌아간 뒤 칠판에는 누군가 그은 희미한 밑줄이 남아 있었고, 맨 앞 책상에는 지우개 가루가 조금 모여 있었습니다. 학기 초에는 낯설던 출석부의 이름들이 이제는 결론부터 쓰는 문장, 괄호가 많은 문장, 첫 줄을 오래 붙드는 습관과 함께 떠오릅니다. 이름보다 문장의 버릇을 먼저 익힌 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익숙해지는 일은 편해지는 일만은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는 드물게 수업도 회의도 없는 시간이 생겨 과제 파일을 열지 않고 공책에 어제 일을 적었습니다. 중간고사철이라 방문을 닫아 둔 아이의 기척, 아직 손대지 못한 첨삭 파일, 학생이 다시 감춘 휴대폰 화면이 문장 옆에 자꾸 붙었습니다. 여유가 생기면 생각이 반듯해질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곁가지만 늘어납니다. 공책 아래쪽에는 지우개 가루라고 쓰고, 그다음 줄은 비워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