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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 속 바다

어제 일요일 늦은 오후, 애월 해안도로를 걷다가 늘 지나치던 작은 가게 앞에서 멈췄어요. 보리는 돌담 옆에 코를 붙이고 오래된 냄새를 읽는 중이었고요. 유리창에는 바다 엽서가 여러 장 붙어 있었어요. 희게 번진 파도, 짙은 남색 바위, 한 줄로 곧은 수평선. 기울어진 빛이 유리에 닿을 때마다 바다가 잠깐씩 사라졌어요. 저는 그 앞에서 한참 망설였어요...

한한지우 2026-11-02 2분 읽기 조회수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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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에세이

남은 오후

몇 해 전 가을 수요일 오후, 마지막 분반의 학생들이 거의 빠져나간 강의실에는 의자를 미는 소리만 잠깐씩 남아 있었습니다. 칠판 한쪽에는 수업 중 고쳐 쓴 문장이 지워지지 않은 채 있었고, 닫히지 않은 창문으로 들어온 공기가 출석부의 얇은 종이를 들썩였습니다. 다음 수업이 없는 오후였습니다. 서둘러 강의실을 비워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복도와 책상...

정정수빈 2026-10-01 3분 읽기 152 2 2
컬럼/에세이

계산기를 꺼내게 한 문제

지난주 화요일 4교시였어요. 칠판에 두 물건의 가격을 적었어요. 하나는 18,900원, 다른 하나는 17,500원이었고 할인율은 20%와 12%였어요. 처음에는 계산기를 가방에 넣으라고 했어요. 백분율도 소수 곱셈도 직접 해야 한다고 봤고, 자꾸 꺼내면 계산 연습이 무너질까 걱정됐어요. 그런데 5분쯤 지나니 교실이 묘해졌어요. 비교할 조건보다 소수점만 ...

김김민준 2026-10-22 2분 읽기 139 1 2
컬럼/에세이

학원 상담에서 두 가지만 묻습니다

원장실 탁자 위에 수학 교재가 세 권 놓여 있었습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 아내와 중2 아들의 학원 상담을 갔습니다. 예전 같으면 몇 쪽까지 나갔는지, 숙제는 많은지부터 확인했을 것입니다. 영업 일을 오래 해서인지 자꾸 진행표부터 보게 됩니다. 그렇게 상담하고 돌아오면 아들에게도 “진도는 따라가니”, “숙제는 다 했니”라고 물었습니다. 대답은 점점 짧아졌...

윤윤도현 2026-10-10 2분 읽기 138 3 4
컬럼/에세이

이직 공고를 닫는 이유

“이 조건은 코드만 봐서는 왜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주 수요일 오후, 판교 사무실에서 배포를 앞두고 H님이 자리로 왔습니다. 오래된 결제 연동에서 특정 응답만 한 번 더 확인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저도 코드만 보면 이상했습니다. 슬랙 검색창에 오류 문구를 넣고, 3년 전 장애 문서까지 열었습니다. 외부 결제사가 실패 응답을 늦게 뒤집었던 날이 있었고, ...

박박지훈 2026-10-15 2분 읽기 129 2 3
컬럼/에세이

검은 창의 물결

자정이 넘어서야 외주 스케치를 멈췄어요. 화면을 오래 본 눈이 따끔거려 태블릿을 뒤집어 두고, 작업실 창문을 손가락 두 마디쯤 열었어요. 낮보다 낮고 긴 파도 소리가 틈으로 들어왔어요. 검은 유리에는 책상과 내 얼굴만 희미하게 떠 있었고요. 바깥은 보이지 않는데 물결은 자꾸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 아니 그냥 피곤해서 그렇게 들렸는지도... 발치의 보리는 귀...

한한지우 2026-10-14 1분 읽기 126 2 2
아이디어 노트

커피포트가 멈춘 아침

전원 버튼을 누르자 빨간 불이 잠깐 들어왔어요. 지난 금요일 1교시 전이었어요. 창가 쪽 커피포트는 낮게 딸깍거리더니 그대로 조용해졌어요. 두 번 더 눌렀지만 물은 끝내 끓지 않았어요. 박 선생님과 미지근한 물을 컵에 받아 들고 잠깐 서 있었네요. 저는 새로 사야 하나 먼저 생각했어요. 박 선생님은 옆 교무실에 남는 게 있는지 물어보자고 했고요. 말은 그게...

김김민준 2026-10-12 1분 읽기 125 1 3
컬럼/에세이

노래의 다음 소절

“아빠, 여기 서 있어.” 월요일 저녁, 밥을 먹고 난 뒤 딸은 거실 소파 앞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어린이집에서 선생님이 알려준 도토리 노래라고 했습니다. 첫 소절은 도토리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거기까지는 알아들었습니다. 중간부터는 단어들이 한 덩어리처럼 들렸습니다. 제가 박수를 반 박자 늦게 치자 딸이 손을 내렸습니다. “다시 해야 ...

박박지훈 2026-10-13 2분 읽기 124 4 2
컬럼/에세이

저녁 식탁의 말

월요일 저녁, 국 냄비의 불을 줄이고 멸치볶음 접시를 식탁 가운데 놓는데 아들이 숟가락을 든 채 물었습니다. “엄마는 오늘 학교에서 뭐 했어?” 수업하고 과제를 읽었다고, 별일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들은 더 묻지 않고 국에 밥을 조금 말았습니다. 평소에는 내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면 괜찮았다는 말이나 고개 한 번으로 끝내는 아이인데, ...

정정수빈 2026-09-29 3분 읽기 123 1 0
아이디어 노트

중간쯤

어제 화요일 늦은 오후, 마지막 수업이 끝난 빈 강의실에서 출석부를 덮으려는데 학생 하나가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서평 초안을 지금 내도 되느냐고, 마감은 남았는데 첫 문장만 자꾸 고치게 된다고 했습니다. 휴대폰 화면을 내미는 학생 앞에서 나는 문장을 읽기보다 그날 세 분반에서 비슷한 질문을 몇 번 들었는지 먼저 헤아렸습니다. 주제를 바꿔도 되는지, 이렇...

정정수빈 2026-10-21 2분 읽기 122 2 2
컬럼/에세이

바로 말하지 않게 된 것

“선생님, 저는 진짜 억울해요.” 점심을 먹고 2학년 교실에 올라오자 한 학생이 찾아왔어요. 쉬는 시간에 자리 때문에 친구와 말이 세게 오간 모양이었어요. 예전 같으면 누가 먼저 그랬는지부터 물었을 거예요. 빨리 가려야 다음 일이 안 생긴다고 생각했거든요. 오늘은 빈 의자에 잠깐 앉아 있으라고 했어요. 학생 물병을 가리키며 물부터 한 모금 마시게 했...

김김민준 2026-10-16 1분 읽기 122 0 0
컬럼/에세이

지우지 않은 선

토요일 점심 무렵, 애월 작업실 책상에서 김 선생님의 인물 드로잉을 열었어요. 3기 피드백 창 옆에는 식은 커피가 있었고, 손은 자꾸 태블릿 펜으로 갔어요. 눈 위치에 비해 턱이 조금 길어 보였거든요. 예전 같으면 새 레이어를 만들었을 거예요. 눈썹과 코끝, 턱 아래에 가로선을 긋고 제가 맞다고 생각한 턱선을 진한 색으로 얹었겠지요. 빠르고 친절해 보이는...

한한지우 2026-09-19 2분 읽기 120 2 1
컬럼/에세이

불안을 적는 칸

화요일 아침 아홉 시 조금 넘어서 집 책상에 교육학 노트를 폈다. 독서실에 가져갈 것만 챙기려 했는데, 목차를 보는 순간 오늘 읽을 범위보다 11월 시험장이 먼저 떠올랐다. 가방은 아직 비어 있었다. 형광펜이 바닥에 굴러가서 주우려다가 불안하면 그냥 써 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게 생각났다. 빈 종이를 한 장 뽑았다. 시험장에서 교육학 답안 첫 문장이...

최최우진 2026-10-20 2분 읽기 119 2 0
아이디어 노트

처음부터 다 말해줬다

지난봄 월요일 데이, 8시 전 준비실에서 첫 신규를 붙잡고 업무 순서를 설명했어요. 인쇄한 체크리스트를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아침 확인부터 점심 전까지, 왜 그 순서여야 하는지도 전부 말했죠. 불안해 보여서 더 길게 했어요. 설명하는 동안에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런데 혼자 해보라고 하니 첫 칸 앞에서 멈췄어요. “뭐부터 하면 되죠?”라고 다시 물었고요...

강강하은 2026-10-10 2분 읽기 118 2 3
아이디어 노트

설명이 시작되는 자리

“내일도 어린이집 가야 해?” 일요일 저녁, 거실 바닥에 앉아 있던 딸이 물었습니다. 저는 어린이집은 평일에 가는 곳이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간다는 말부터 꺼냈습니다. 달력에서 빨간 날이 아니면 간다는 설명도 붙였습니다. 딸은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아내는 내일 아침에 이 선생님을 만나고, 토끼 가방을 메고, 하원 뒤에는 엄마랑 집에 온다고 차례로 말...

박박지훈 2026-10-05 2분 읽기 118 0 2
컬럼/에세이

신규가 처음 웃었다

지난주 금요일 이브닝, 병동 스테이션에서 세 번째 신규가 보호자 전화를 받기 전 메모를 한참 봤어요. 첫 문장을 속으로 고르는 게 보였고, 입술만 몇 번 움직였어요. 저는 옆에 붙어 있으면 더 긴장할 것 같아서 두 걸음쯤 떨어져 있었어요. 괜히 말을 보태지 않았어요. 사실 저도 뭘 기다리는 사람처럼 컴퓨터 화면만 넘겼고요. 통화는 생각보다 길지 않았어요. ...

강강하은 2026-10-07 2분 읽기 117 2 1
아이디어 노트

틀린 답을 기다리기

어젯밤 학교 근처 독서실에서 교육학 오답 한 개를 펴 놓고 한참 멈췄다. 또 해설 버튼부터 누르려다가 손을 뗐다. 5월 교생실습 때 정 선생님 수업이 갑자기 생각났다. 학생이 답을 못하면 교실이 조용해지는데, 선생님은 바로 대신 말하지 않았다. 먼저 풀이를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옆에서 본 그 몇 초가 진짜 길었다. 나는 그 시간을 못 버티는 편이다...

최최우진 2026-10-02 2분 읽기 117 1 1
컬럼/에세이

휴대폰을 내려놓은 수학 시간

지난달 수요일 3교시였어요. 2학년 교실 칠판에 QR을 띄웠어요. 휴대폰을 꺼내라는 말에 교실이 금방 들떴어요. 화면은 빨랐고 모둠은 달랐어요 좌표를 움직이면 그래프가 바뀌는 사이트였어요. 모둠마다 기울기와 절편을 찾아보게 했어요. 처음 몇 분은 제법 잘 따라왔어요. 곧 속도가 갈리기 시작했어요. 로그인이 풀린 학생도 있었고, 배터리가 4퍼센트인 학생...

김김민준 2026-10-14 2분 읽기 116 3 2
컬럼/에세이

물음표 하나

목요일 늦은 오후, 연구실에서 한 학생의 서평 첫 문장을 읽다가 빨간 펜으로 적은 말을 지웠습니다. ‘문장이 너무 단정적입니다.’ 늘 쓰던 지적이었는데, 그날은 그 말로 학생이 무엇을 고칠 수 있을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그 자리에 질문을 적었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정확하다고 판단했나요?’ 이 책은 현대인의 고독을 정확하게 ...

정정수빈 2026-10-17 2분 읽기 116 1 4
컬럼/에세이

온보딩 문서의 세 줄

지난 화요일 오후, 판교 사무실 자리에서 S님 화면을 같이 봤습니다. 개발환경 문서의 중간쯤이었습니다. 설치는 거의 끝났는데 다음에 뭘 확인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문서는 길었습니다. 명령어와 캡처도 충분했습니다. 어디까지 되면 첫 실행이 끝난 것인지, 권한이 없으면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지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맨 위에 붙인 문장 기...

박박지훈 2026-10-09 2분 읽기 114 0 1
컬럼/에세이

명절 표를 먼저 봤다

지난주 금요일 이브닝 끝무렵, 인계 준비로 스테이션이 어수선한데 게시판 쪽만 이상하게 사람이 계속 바뀌었어요. 다음 달 명절 근무표가 붙은 거였어요. 다들 대놓고 몰려가진 않고, 지나가는 척 한 번씩 멈췄어요. 저도 펜 내려놓고 갔는데 제 이름보다 세 번째 신규 이름부터 찾았어요. 찾고 나서 조금 웃겼어요. 예전에는 새 표만 붙으면 내 오프가 며칠인지, ...

강강하은 2026-10-23 2분 읽기 112 4 3
Q&A

마트 안을 두 번 돌고 나왔다

두부 코너 앞에서 한참 서 있었어요. 어제 6시가 조금 넘어 집 근처 마트에 들렀는데, 배는 고픈데 딱히 먹고 싶은 게 없었어요. 두부 코너에서 반찬 코너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또 같은 길을 걸었어요. 카트를 끌 것도 없어서 장바구니만 손에 들고요. 점심때 김 선생이 “오늘 저녁은 뭐 드세요?” 하고 물었던 게 떠올랐어요. 저는 “혼자 먹을 건데요,...

이이서연 2026-10-16 3분 읽기 112 3 3
컬럼/에세이

빈 책상 위의 선

“태블릿 펜은 어떤 걸 써야 하나요?” 지난 기수 첫 수업이던 토요일 오후, 애월 집 작업실 채팅창에 박 선생님의 질문이 올라왔어요. 종이 한 장 예전 같으면 펜촉 차이와 앱, 종이 종류를 먼저 설명했을 거예요. 실제로 그랬고요. 화면에는 구매 링크를 묻는 채팅이 오래 남았어요. 도구가 없는 분은 시작도 못 한 듯 조용해졌고, 좋은 펜을 준비한 분도...

한한지우 2026-09-26 2분 읽기 112 1 2
Q&A

합격 다음 날

“시험 끝나면 뭐 할 건데.” 어제 저녁 식탁에서 엄마가 물었다. 여행 한번 가고 싶고, 밀린 게임도 며칠 하고 싶다고 했다. 거기까진 바로 나왔다. 근데 시험 끝난 날 말고 합격 발표 다음 날을 떠올려 보려니 말이 막혔다. 합격이라는 두 글자를 확인하고 자고 일어난 아침. 그 다음부터 나는 뭘 준비하지. 학교에 가면 어떤 얼굴로 교무실 문을 열지. ...

최최우진 2026-10-12 1분 읽기 111 3 3
컬럼/에세이

종이의 무게

화요일 이른 아침, 연구실 책상 한쪽에 놓아 둔 인쇄 과제를 두 팔로 안아 가운데로 옮기다가 종이 더미가 오른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손바닥으로 윗부분을 누르고 아래쪽을 다시 맞췄습니다. 한글날 연휴가 지난 뒤 제출된 세 분반 과제를 어제까지 출력해 둔 것인데, 화면에서는 파일 이름이 세로로 늘어서 있을 뿐이던 것이 종이가 되자 갑자기 부피와 무게를 가졌습니다...

정정수빈 2026-10-13 3분 읽기 111 1 2
아이디어 노트

화분 앞에 물통이 늘어선 아침

물을 주고 싶은 마음 “선생님, 이 잎 만져 봐도 돼요?” 화요일 1교시 전, 서준이가 창가의 스킨답서스를 살피더니 다른 아이들도 자기 물통을 들고 모였어요. 어제 방과 후에 놓아둔 작은 화분이었는데, 금세 줄이 생겼어요. 처음에는 한 모금씩만 주면 괜찮겠다 싶었어요. 쉬는 시간이 두 번 지나고 보니 누가 얼마나 줬는지 알 수 없었고, 화분받침에는 물이 고...

이이서연 2026-10-06 1분 읽기 110 2 0
컬럼/에세이

학원 세 곳을 한 곳으로 줄이고 나서

지난달 토요일 저녁, 인천 집 식탁에 중2 아들의 학원 시간표를 다시 펼쳐 놓았습니다. 수학, 영어, 과학 칸이 평일 저녁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고, 그 옆에는 과목별 숙제가 적혀 있었습니다. 아들은 이동하고 숙제하느라 늘 늦었고, 주말에도 빠진 진도를 메우느라 쉬는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학원을 줄이면 성적부터 떨어질까 겁이 났습니다. 세 곳에...

윤윤도현 2026-10-14 2분 읽기 109 3 2
컬럼/에세이

체크리스트를 같이 고쳤다

지난주 월요일 데이 근무 전, 병동 스테이션에 체크리스트를 펼쳐 놨어요. 인계 준비하는 선생님들한테 종이를 건네며 물었어요. “이 칸은 실제로 언제 확인해요?” 처음 만든 체크리스트는 제가 신규에게 매일 설명하는 일을 순서대로 적은 종이였어요. 설명했으면 표시하고, 한 번 보여 줬으면 확인받는 식이었죠. 그 정도면 빠뜨릴 일이 줄어들 줄 알았는데요. 막...

강강하은 2026-09-29 2분 읽기 109 2 2
컬럼/에세이

문방구 셔터에 붙은 종이

“그럼 여기 없어져요?” 화요일 오후, 하교 지도를 마치고 정문 앞을 지나는데 한 아이가 가게 한쪽 셔터를 가리켰어요. 문방구 앞에 모여 연필깎이와 지우개를 구경하던 아이들이 저보다 먼저 종이를 발견한 거예요. 흰 종이에는 이달 말까지만 영업한다는 문장이 검은 글씨로 적혀 있었어요. 저는 다음 달에도 문구점은 다른 곳에 있다고 대답했어요. 조금 걸어가면 ...

이이서연 2026-10-13 2분 읽기 109 0 0
컬럼/에세이

이름 옆의 색

지난 목요일 밤, 애월 작업실에서 3기 과제 창을 열다가 최 선생님 그림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 뻔했어요. 답글 첫 줄에 성까지 썼다가 지웠어요. 커피잔 옆에서 커서만 깜박였고요. 처음엔 제출 순서와 얼굴을 같이 외우면 될 줄 알았어요. 첫 번째 칸, 두 번째 칸, 프로필 사진. 낮에는 제법 맞는데 밤 열한 시가 넘어가면 이름이 슬쩍 자리를 바꿨어요. 과제는...

한한지우 2026-09-30 2분 읽기 108 2 1
컬럼/에세이

두 아이를 창가에 앉힌 뒤

“내 색종이 망가졌어요.” 월요일 2교시 쉬는 시간, 한 아이가 구겨진 색종이를 들고 울었고, 옆에 있던 아이는 “제가 먼저 민 거 아니에요”라고 곧바로 말했고요. 둘 다 자기 억울함부터 꺼내서 창가 쪽 작은 책상 양끝에 따로 앉혔어요. 처음에는 누가 먼저 그랬는지 묻지 않았어요. 물을 한 모금씩 마시게 하고, 울음이 조금 잦아든 아이부터 “내가 본 일을...

이이서연 2026-10-19 2분 읽기 108 1 2
컬럼/에세이

마감 전의 점

지난 목요일 밤, 애월 집 작업실에 과제 창만 푸르게 떠 있었고, 미제출 이름 옆에 써 둔 개인 메시지를 한 줄씩 지웠어요. 3기 첫 주에는 마감 전날마다 이름을 확인했어요. 그림이 아니어도 괜찮고, 점 하나라도 올려 달라고 따로 보냈죠. 제출칸은 조금씩 찼어요. 그런데 윤 선생님이 급히 그린 빈 스케치를 올린 뒤 늦어서 미안하다는 답을 남겼는데, 제가 기...

한한지우 2026-10-11 2분 읽기 108 0 3
컬럼/에세이

아무것도 안 한 토요일

지난 토요일 오후, 거실 시계만 자꾸 봤어요. 소파에 앉은 건 점심 전이었고, 잠깐 쉬려던 참이었어요. 아침에는 평소처럼 하천을 뛰어 5km를 채우고 돌아와 바로 샤워했어요. 수건까지 널 때는 하루가 길 줄 알았어요. 수행평가 기록을 정리해야 했고 다음 주 수업 자료도 봐야 했는데, 노트북은 충전선만 꽂힌 채 식탁 위에 그대로 있었어요. 휴대폰을 ...

김김민준 2026-09-24 2분 읽기 107 3 3
컬럼/에세이

기출 세 번째

지난주 화요일 밤, 학교 근처 독서실에서 한국사 기출을 세 번째 폈다. 옆자리 동기한테 몇 번 돌렸냐고 물었다. 바로 같은 질문이 돌아왔다. 세 번째인데 대답이 좀 늦었다. 세 번째인데 또 틀리는 번호가 보였다. 첫 회독은 답이랑 해설을 같이 넘겼고, 두 번째는 선지 옆에 왜 아닌지만 적었다. 많이 본 것 같은데 책을 덮으면 별로 안 남았다. 이번엔 하루 ...

최최우진 2026-10-14 1분 읽기 107 1 3
컬럼/에세이

과제의 순서

노트북 화면 맨 위에서 커서가 깜박이고 있었습니다. 2학기 둘째 주 화요일 오전, 대전의 대학 강의실에서 첫 과제를 설명하는데 몇몇 학생이 내용보다 제목 칸을 먼저 붙들고 있었습니다. 제목이 정해져야 쓸 수 있다는 표정이었습니다. 한 학생은 빈 문서에 두세 글자를 적었다가 지우기를 되풀이했습니다. 저는 제목을 비워 두어도 된다고 말한 뒤, 오늘 수업이 끝난...

정정수빈 2026-09-17 3분 읽기 107 1 0
컬럼/에세이

학기 첫날 자리를 너무 멀리 뒀다

지난 3월 첫째 주 월요일 아침, 두 아이의 책상 사이를 교실 끝과 끝만큼 벌려 놓았어요. 둘이 붙어 있으면 이야기가 많아진다는 말을 전해 들었고, 한 아이는 창가에, 다른 아이는 복도 쪽에 앉혔지요. 조용한 첫 교시를 기대했는데 둘 다 자꾸 고개를 돌렸어요. 제가 이름을 부르면 얼른 칠판을 봤다가 잠시 뒤 다시 친구 자리를 확인했고요. 준비물을 꺼낼...

이이서연 2026-10-11 3분 읽기 105 2 1
컬럼/에세이

수행평가 기준을 먼저 읽은 시간

지난주 목요일 5교시, 교실 뒤쪽에서 손이 하나 올라왔어요. 평가표를 나눠 준 직후였는데, 무엇을 써야 근거를 잘 제시한 건지 묻더라고요. 근거를 잘 제시함. 제가 만든 문장이었는데 바로 답하기 어려웠어요. 채점할 때는 알 것 같았지만 쓰는 학생에게는 꽤 흐린 말이었어요. 예전에 박 선생님이 해 준 조언이 떠올랐어요. 기준을 학생이 쓰는 말로 바꿔 보...

김김민준 2026-10-09 2분 읽기 104 3 1
컬럼/에세이

발표 전에 줄인 것들

“열여덟 장인데, 너무 많나요.” 지난 금요일 오후 4시, 판교 사무실 작은 회의실에서 J님과 다음 주 사내 스터디 자료를 열어봤습니다. J님은 코드 리뷰에서는 설명을 잘합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머리가 하얘진다고 했습니다. 첫 장부터 배경과 용어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듣는 쪽에서는 아직 무슨 얘기인지 잡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지난 배포에서 실제로 생긴 오...

박박지훈 2026-10-19 2분 읽기 104 2 3
컬럼/에세이

멈춘 화면의 목소리

“설명은 알겠는데, 어디부터 고쳐야 할지 더 어려워졌어요.” 지난 금요일 밤, 애월 작업실에서 이 선생님의 답장을 다시 읽었어요. 선의 방향과 명암을 길게 적을수록 정확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고칠 순서까지 한꺼번에 흐려진 모양이었어요. 태블릿 화면을 켰어요. 인물 드로잉 위로 제 손이 움직이는 모습을 녹화했어요. 푸른 화면빛만 책상에 남고 식은 커피는 꽤 ...

한한지우 2026-10-12 2분 읽기 104 2 2
컬럼/에세이

문서의 첫 장을 고르는 일

지난 월요일 오전, 판교 사무실에서 C님과 배치 작업의 수동 재실행 방법을 찾았습니다. 슬랙 검색창에 작업명, 장애 문구, 담당자 이름까지 바꿔 넣었습니다. 이십 분이 넘어가자 C님이 물었습니다. “찾으면 이 질문은 어디에 적어야 하나요?” 팀 위키를 같이 열었습니다. 빈 메뉴가 몇 개 있었고, 2년 전 화면 기준으로 적힌 문서도 있었습니다. 운영, 배치...

박박지훈 2026-09-30 2분 읽기 104 0 4
아이디어 노트

병원 밖에서는 내가 느리다

지난주 수요일 오후, 나이트 끝나고 자고 일어나 동생이랑 동네 휴대폰 매장에 갔어요. 요금제를 바꿀지 말지만 보자고 들어갔는데 번호표를 뽑고도 한참 서 있었어요. 잠은 잤는데 머리는 아직 덜 켜진 느낌이었고요. 직원이 태블릿 화면을 넘기며 데이터, 결합, 할인 항목을 차례로 설명했어요. 말이 빠른 편도 아니었을 텐데 병동에서 제가 신규에게 순서를 설명할 ...

강강하은 2026-10-15 2분 읽기 103 3 6
컬럼/에세이

아침 일곱 시 지하철

아침 일곱 시쯤 병원역에서 지하철을 탔어요. 나이트 인계를 끝낸 사람들은 대체로 말이 없어요. 저도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 빈자리에 앉아 가방만 무릎에 올렸어요. 맞은편에는 교복 입은 학생이 서서 작은 단어장을 보고 있었어요. 눈이 감기면 고개가 한번 떨어지고, 다시 페이지를 폈어요. 손잡이를 잡은 손도 열차 움직임대로 계속 흔들렸고요. 요즘 중간고사 때인가...

강강하은 2026-10-12 2분 읽기 103 2 2
컬럼/에세이

짧은 문장

“무엇을 남겨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난주 목요일 오후, 대전의 대학 강의실에서 600자 서평의 첫 문장을 고쳐 보게 했을 때 한 학생이 지운 문장 옆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습니다. 원고에는 책의 줄거리와 저자의 주장, 읽으며 떠올린 경험이 빽빽하게 들어 있었고, 학생은 그중 어느 하나도 함부로 빼지 못했습니다. 이미 길게 쓴 초안을 줄이는 학생들은 연필...

정정수빈 2026-10-05 3분 읽기 102 2 2
컬럼/에세이

시험 전날에 하는 말

문제집을 잠깐 덮어 보자고 했어요. 지난 화요일 아침 자습 시간이었어요. 평소보다 조용한 2학년 교실이었어요. 아이들은 틀린 문제만 다시 붙잡고 있었고요. 첫 지필평가를 앞둔 날이라 “잘 봐”라는 말부터 나올 뻔했어요. 입 안에서 한 번 멈췄어요. 그 말은 응원은 되지만, 시험지를 받은 뒤 할 일을 알려 주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첫 장을 받으면 이름부터 ...

김김민준 2026-09-23 2분 읽기 102 1 0
컬럼/에세이

실수 보고부터 막았다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지난주 나이트 인계 직전, 병동 스테이션에서 세 번째 신규가 그렇게 말하고 멈췄어요. 손에는 확인표가 있었고, 빠진 칸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고 있었어요. 주변은 인계 준비로 바빴고 저는 시계를 먼저 봤어요. 제가 바로 한 말은 “왜 지금 알았어요?”였어요. 이미 얼굴이 굳어 있던 신규는 그 뒤로 더 짧게만 대답했어요. 무엇이 빠졌...

강강하은 2026-09-24 3분 읽기 100 2 1
아이디어 노트

달력을 한 장 넘기지 못했다

창문부터 열었어요. 8월 셋째 주 금요일 오후 두 시쯤, 아무도 없는 3학년 교실은 바깥 소리만 크게 들어왔어요. 방학 마지막 금요일이라 2학기 시간표를 붙이고 이름표 몇 장을 다시 뽑으러 잠깐 나온 날이었어요. 교탁 위에는 방학 전에 놓아둔 가위와 풀도 그대로였는데, 제 교실 같지 않았어요. 시간표는 칠판 옆에 대 보았다가 조금 기울어서 다시 뗐어요. ...

이이서연 2026-09-28 2분 읽기 100 1 0
컬럼/에세이

퇴사하겠다는 말을 듣고 나서

“다음 달까지만 일하려고 합니다.” 어제 목요일 오후, 남동공단 회사의 작은 회의실에서 최 대리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두 손을 모은 채 한참 망설이더니 더 늦기 전에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연봉이 문제인지, 맡은 업무가 힘든지부터 물었습니다. 질문이라기보다 ...

윤윤도현 2026-10-16 2분 읽기 99 2 2
컬럼/에세이

체크리스트 칸을 바꿨다

지난주 목요일 이브닝, 저녁 7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어요. 내과 병동 스테이션에서 세 번째 신규가 같은 확인을 또 빼먹은 걸 봤는데, “이거 확인했어요?” 하니 체크리스트를 다시 내려다봤고요. 처음 두 번은 신규가 급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옆에 서서 업무 순서를 다시 말해주고, 끝나면 체크리스트부터 보라고 했죠. 솔직히 세 번째에도 빠지니 설명을 더 ...

강강하은 2026-10-19 2분 읽기 98 3 2
아이디어 노트

문제 읽는 시간을 남기는 법

지난 수요일 5교시, 교실 뒤에 의자를 놓고 앉았어요. 박 선생님 2학년 수학 수업을 참관하던 때였는데, 점심 뒤라 저도 눈이 조금 무거웠어요. 첫 문제가 화면에 떴는데 바로 풀지 않았어요. 박 선생님은 조건에 밑줄만 치게 했고, 설명도 힌트도 없이 스무 초쯤 기다리더라고요. 그 짧은 침묵이 생각보다 길게 느껴졌어요. 아이들이 손을 들기 전에는 짝과 표시를...

김김민준 2026-09-20 2분 읽기 98 3 3
아이디어 노트

중2 성적표 앞에서 제가 급해졌습니다

지난 토요일 오전, 인천 집 식탁에서 중2 아들이 중간고사 성적표를 내밀었습니다. 저는 종이를 받아 들자마자 수학 점수부터 짚었습니다. “학원 숙제는 다 한 것 맞니”, “이 점수로 괜찮겠니”가 거의 붙어서 나왔습니다. 아들은 잠깐 성적표를 보더니 물을 마시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걱정해서 한 말이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점심을 ...

윤윤도현 2026-10-22 2분 읽기 98 2 2
페다고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