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다고노트

누구나 지식과 아이디어를 나누는 공간

컬럼/에세이

남겨 둔 문장

정
정수빈
2026-10-28 09:50 61

지난주 금요일 늦은 오후, 연구실 책상에서 2분반 김 학생의 수정 원고를 넘겼습니다. 과제 마감 뒤의 첨삭이라 눈이 쉽게 흐려졌고, 같은 문장을 읽고 또 읽어도 뜻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원고에는 단어를 바꾸고, 문단을 옮기고, 다시 처음 표현으로 돌아간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빨간 펜 뚜껑은 자꾸 책상 아래로 굴러갔습니다.

한쪽 여백에서 작은 글씨를 만났습니다.

“이 문장은 제가 아직 잘 모르겠는데, 지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아직 내가 선택한 것이 선택인지, 대답을 미룬 것인지 알지 못한다.

뜻이 흐린 문장에는 더 분명하게 쓰라고 적어 왔습니다. 주어가 무엇을 망설이는지, 선택과 유예가 어떻게 다른지 밝혀 보라고 쓸 수도 있었습니다. 그날도 빨간 펜을 들었습니다. 한참을 멈췄습니다. 문장을 완성시키려는 마음이 언제나 옳은가 싶었고, 아직 모르는 채로 문장을 남겨 두는 일도 쓰기의 일부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쉽게 허락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창가에 둔 종이컵의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고, 다음 원고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는 여백에 짧게 적었습니다. “조금 더 곁에 두어도 좋겠습니다.” 그 말을 쓰고 나니 첨삭이라기보다 내 문장에 붙이는 메모처럼 보였습니다. 오래 읽어도 열리지 않는 문장, 지우지 못해 원고 한쪽에 남겨 둔 문장이 내게도 몇 개 있습니다.

아직 이해하지 못한 문장을 곁에 두고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정수빈

페다고노트 작가

구독자 0 게시글 14
정수빈

댓글 3개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김
김민준 2026-10-28 10:19

수학 풀이에서도 학생이 지우지 말아 달라고 한 중간 과정은 그대로 둔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그 부분부터 다시 설명하더라고요.

정
정수빈 2026-10-28 12:56

남겨 둔 과정이 나중에는 설명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겠네요.

한
한지우 2026-10-28 12:13

수강생 그림에도 설명은 안 되는데 지우지 말아 달라는 선이 있습니다. 일단 그대로 두면 다음 과제에서 다시 이어지기도 하더라고요.

다른 게시물

여덟 번째 칸

파란 칸 열두 개가 화면에 길게 누워 있었어요. 지난주 화요일 밤, 애월 작업실에서 3기 수강생들의 4주차 과제를 넘겨보다가 커리큘럼 표를 다시 열었어요. 처음에는 기초 선부터 완성작까지 천천히 데려가고 싶어서 12주를 꼭꼭 채웠거든요. 빈칸이 있으면 덜 가르치는 것 같기도 했고요. 그런데 중간부터 과제를 밀린 화면이 자꾸 남았어요. 피드백을 길게 쓸수록 ...

by 한지우

모둠이 멈추던 세 순간

“누가 적을래?”라는 말만 돌았어요. 지난주 금요일 3교시, 2학년 교실에 닮음 조건 카드를 펼쳤죠. 시작부터 멈춘 모둠 카드와 활동지를 한꺼번에 줬고 바로 손이 움직일 줄 알았죠. 근데 이게 역할 정하기부터 길어지더라고요. 기록자를 고르는 동안 문제는 그대로였고 아무도 첫 문장을 읽지 않았죠. 제가 설명을 덜 했나 싶어 잠깐 서성였어요. 발표자와 ...

by 김민준

밤 아홉 시 이후

월요일 밤 9시 15분, 딸이 잠든 방 문을 손잡이까지 잡고 닫았습니다. 거실에는 블록 네 개가 떨어져 있었고 식탁에는 반쯤 남은 물컵이 있었습니다. 노트북부터 열 생각이었는데, 발로 블록을 밟을 것 같아 먼저 주웠습니다. 물컵도 싱크대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미뤄 둔 개인 메모를 열었습니다. 제목을 적으려는데 소파 옆에 어린이집 가방이 보였습니다. 월요일...

by 박지훈

축하한다는 말

축하한다는 말

“말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나 붙었어.” 점심 무렵 학교 도서관 계단에 앉아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같이 임용 얘기하던 과 동기였다. 부산에 있는 교육 관련 출판사라고, 아직 좀 얼떨떨하다고 했다. 축하한다고 했다. 진짜 잘됐다고도 했다. 통화를 끊고 나니 내가 축하한다는 말을 몇번 했는지 그게 먼저 생각났다. 독서실에 가져갈 한국사 책들을 꺼냈다...

by 최우진

야근 다음 날의 질문

“이걸 배포 전에 어떻게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수요일 밤 11시 40분, 판교 사무실에서 장애 대응을 마친 뒤 J님이 물었습니다. 원인은 작은 설정값 하나였습니다. 로그를 같이 보다가 찾았고, 값을 되돌리니 서비스도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는 복구 순서와 확인할 항목만 말했습니다. 답변이라기보다 상황 공유에 가까웠습니다. 각자 휴대폰으로 막차 시...

by 박지훈

D-60 메모

점심 먹고 독서실에 들어와 필기 노트를 펴는데, 접어 둔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8월 말에 만든 계획표였다. 목요일 칸 위에 D-60이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지금은 시험까지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종이 속 숫자는 아직 60이라서 잠깐 손이 멈췄다. 그날 적어 둔 한국사 회독 범위는 반쯤 지워져 있었다. 교육학 인강 개수도 애매했다. 끝낸 것보...

by 최우진

페다고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