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다고노트

누구나 지식과 아이디어를 나누는 공간

컬럼/에세이

여덟 번째 칸

한
한지우
2026-10-27 14:51 65

파란 칸 열두 개가 화면에 길게 누워 있었어요.

지난주 화요일 밤, 애월 작업실에서 3기 수강생들의 4주차 과제를 넘겨보다가 커리큘럼 표를 다시 열었어요. 처음에는 기초 선부터 완성작까지 천천히 데려가고 싶어서 12주를 꼭꼭 채웠거든요. 빈칸이 있으면 덜 가르치는 것 같기도 했고요.

그런데 중간부터 과제를 밀린 화면이 자꾸 남았어요. 피드백을 길게 쓸수록 다음 주 과제는 더 쌓였고, 9주차쯤에는 배운 것을 그려볼 시간보다 수업을 따라갈 시간이 부족해 보였어요. 혹시 내 설명을 읽느라 그림을 못 그리는 건가 싶었어요.

지난 기수의 질문이 들어온 날짜와 제출 시간을 표에 다시 적었어요. 커피는 두 번 데웠다가 둘 다 잊었고요. 모니터의 흰빛 옆으로 파도 소리가 낮게 붙던 밤. 남겨야 할 수업에 동그라미를 치니 여덟 칸이었어요.

설명으로 길어진 부분은 5분 안쪽 영상과 참고 그림으로 옮겼어요. 수업 하나를 빼는 대신 같은 선을 두세 번 다시그릴 자리를 넣었고요. 이번 3기에는 다음 과제로 빨리 넘어가기보다, 첫 그림과 세 번째 그림을 나란히 올려 달라고 하고 있어요. 피드백도 고칠 것 한 가지부터 적어요.

과정을 줄일 때는 수업 수보다 제출 사이의 간격을 먼저 보는 편이 낫더라고요. 어느 주부터 질문이 몰리는지, 영상 재생보다 과제 제출이 늦어지는지 적어보면 덜어낼 칸이 보여요. 그래도 너무 줄이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은 조금 남아 있고요.

여덟 칸이 자꾸 반짝여요

한지우

페다고노트 작가

구독자 0 게시글 16
한지우

댓글 3개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이
이서연 2026-10-27 17:31

피드백을 고칠 것 한 가지부터 적는다는 대목에서 제 교실의 공책 검사가 떠올랐어요. 저도 빨간 글씨가 길어진 날엔 아이들이 다음 숙제를 더 미루더라고요.

박
박지훈 2026-10-27 19:51

저희 신입 온보딩도 제출 간격을 늘리니 밀림이 줄었습니다.

한
한지우 2026-10-28 08:00

제출 사이 간격이 실제로 밀림에 영향을 주는군요. 온보딩에서도 같은 흐름이 보였다는 말이 반갑습니다.

다른 게시물

서울의 종이 냄새

토요일 오전이었어요. 현관문을 열자 납작한 상자가 발끝에 닿았어요. 서울 출판사 이름이 찍힌 송장을 보고도 한참동안 들지 못했고요. 최근 외주 원고가 또 왔나 싶어 주말까지 모른 척할까, 잠깐 진지하게 생각했어요. 테이프를 길게 뜯으니 봄에 그린 그림이 실린 동화책이 나왔어요. 편집자님의 짧은 메모도 한 장. 견본이라는 두 글자를 보고서야 어깨가 풀렸어요...

by 한지우

스무 해째 같은 시간에 여는 문

지난 목요일 아침 7시 40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회사 현관으로 걸어갔습니다. 공장 쪽은 아직 불이 덜 켜져 있었고, 오래 잡아 온 철문 손잡이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는데 문을 당기는 순간 스무 해 전 처음 출근하던 날의 낯선 냄새가 잠깐 떠올랐습니다. 기름 냄새였는지 새 작업복 냄새였는지는 이제 확실하지 않습니다. 입사 첫날에는 영업이 무엇인지도 잘...

by 윤도현

첫 줄 앞에서

첫 줄 앞에서

“첫 문장부터 안 써져요.” 지난주 목요일 오후, 수업이 끝난 빈 강의실에서 한 학생이 노트북 화면을 내밀었습니다. 서평 과제 파일에는 제목도 이름도 없었고 커서만 첫 줄에서 깜박였습니다. 평소라면 읽은 책의 주제부터 물었을 텐데, 그날은 방금 읽은 대목 가운데 손이 멈춘 곳 하나만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학생은 화면을 한참 보다가 짧게 대답하더군요. 주...

by 정수빈

모둠이 멈추던 세 순간

“누가 적을래?”라는 말만 돌았어요. 지난주 금요일 3교시, 2학년 교실에 닮음 조건 카드를 펼쳤죠. 시작부터 멈춘 모둠 카드와 활동지를 한꺼번에 줬고 바로 손이 움직일 줄 알았죠. 근데 이게 역할 정하기부터 길어지더라고요. 기록자를 고르는 동안 문제는 그대로였고 아무도 첫 문장을 읽지 않았죠. 제가 설명을 덜 했나 싶어 잠깐 서성였어요. 발표자와 ...

by 김민준

밤 아홉 시 이후

월요일 밤 9시 15분, 딸이 잠든 방 문을 손잡이까지 잡고 닫았습니다. 거실에는 블록 네 개가 떨어져 있었고 식탁에는 반쯤 남은 물컵이 있었습니다. 노트북부터 열 생각이었는데, 발로 블록을 밟을 것 같아 먼저 주웠습니다. 물컵도 싱크대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미뤄 둔 개인 메모를 열었습니다. 제목을 적으려는데 소파 옆에 어린이집 가방이 보였습니다. 월요일...

by 박지훈

남겨 둔 문장

지난주 금요일 늦은 오후, 연구실 책상에서 2분반 김 학생의 수정 원고를 넘겼습니다. 과제 마감 뒤의 첨삭이라 눈이 쉽게 흐려졌고, 같은 문장을 읽고 또 읽어도 뜻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원고에는 단어를 바꾸고, 문단을 옮기고, 다시 처음 표현으로 돌아간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빨간 펜 뚜껑은 자꾸 책상 아래로 굴러갔습니다. 한쪽 여백에서 작은 글씨를 ...

by 정수빈

페다고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