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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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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에세이

남겨 둔 문장

지난주 금요일 늦은 오후, 연구실 책상에서 2분반 김 학생의 수정 원고를 넘겼습니다. 과제 마감 뒤의 첨삭이라 눈이 쉽게 흐려졌고, 같은 문장을 읽고 또 읽어도 뜻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원고에는 단어를 바꾸고, 문단을 옮기고, 다시 처음 표현으로 돌아간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빨간 펜 뚜껑은 자꾸 책상 아래로 굴러갔습니다. 한쪽 여백에서 작은 글씨를 ...

정정수빈 2026-10-28 분 읽기 64 3 3
아이디어 노트

첫 줄 앞에서

“첫 문장부터 안 써져요.” 지난주 목요일 오후, 수업이 끝난 빈 강의실에서 한 학생이 노트북 화면을 내밀었습니다. 서평 과제 파일에는 제목도 이름도 없었고 커서만 첫 줄에서 깜박였습니다. 평소라면 읽은 책의 주제부터 물었을 텐데, 그날은 방금 읽은 대목 가운데 손이 멈춘 곳 하나만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학생은 화면을 한참 보다가 짧게 대답하더군요. 주...

정정수빈 2026-10-27 분 읽기 89 1 0
컬럼/에세이

잠깐의 침묵

어제 월요일 오후, 한 학생의 초안을 강의실 화면에 띄우자 교실이 조용해졌습니다. 좋았던 문장부터 말해 보자고 넓게 물었지만 학생들은 화면과 공책을 번갈아 볼 뿐이었고, 발표자는 의자 안쪽으로 조금씩 몸을 접으며 제 얼굴을 살폈습니다. 기다린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손은 자꾸 키보드 쪽으로 갔습니다. 첫 문단의 장면은 잘 보이는데 둘째 문단에서 설명이 길어진다...

정정수빈 2026-10-20 분 읽기 92 2 4
컬럼/에세이

물음표 하나

목요일 늦은 오후, 연구실에서 한 학생의 서평 첫 문장을 읽다가 빨간 펜으로 적은 말을 지웠습니다. ‘문장이 너무 단정적입니다.’ 늘 쓰던 지적이었는데, 그날은 그 말로 학생이 무엇을 고칠 수 있을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그 자리에 질문을 적었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정확하다고 판단했나요?’ 이 책은 현대인의 고독을 정확하게 ...

정정수빈 2026-10-17 분 읽기 119 1 4
컬럼/에세이

종이의 무게

화요일 이른 아침, 연구실 책상 한쪽에 놓아 둔 인쇄 과제를 두 팔로 안아 가운데로 옮기다가 종이 더미가 오른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손바닥으로 윗부분을 누르고 아래쪽을 다시 맞췄습니다. 한글날 연휴가 지난 뒤 제출된 세 분반 과제를 어제까지 출력해 둔 것인데, 화면에서는 파일 이름이 세로로 늘어서 있을 뿐이던 것이 종이가 되자 갑자기 부피와 무게를 가졌습니다...

정정수빈 2026-10-13 분 읽기 112 1 2
아이디어 노트

함께 쓴 초안

지난주 화요일 오전, 대전의 대학 강의실에서 빔프로젝터로 과제 제출란을 띄워 둔 채 학생들에게 AI와 함께 만든 초안도 손보지 말고 그대로 내 보자고 말했습니다. 몇몇은 웃었고, 뒤쪽에서는 정말 그래도 되느냐는 표정으로 화면을 다시 보았습니다. AI를 썼는지 숨기고, 저는 문장의 결을 살피며 적발하려는 방식으로는 학생이 실제로 어디에서 멈추는지 알기 어렵다...

정정수빈 2026-10-08 분 읽기 85 1 2
컬럼/에세이

짧은 문장

“무엇을 남겨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난주 목요일 오후, 대전의 대학 강의실에서 600자 서평의 첫 문장을 고쳐 보게 했을 때 한 학생이 지운 문장 옆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습니다. 원고에는 책의 줄거리와 저자의 주장, 읽으며 떠올린 경험이 빽빽하게 들어 있었고, 학생은 그중 어느 하나도 함부로 빼지 못했습니다. 이미 길게 쓴 초안을 줄이는 학생들은 연필...

정정수빈 2026-10-05 분 읽기 104 2 2
컬럼/에세이

남은 오후

몇 해 전 가을 수요일 오후, 마지막 분반의 학생들이 거의 빠져나간 강의실에는 의자를 미는 소리만 잠깐씩 남아 있었습니다. 칠판 한쪽에는 수업 중 고쳐 쓴 문장이 지워지지 않은 채 있었고, 닫히지 않은 창문으로 들어온 공기가 출석부의 얇은 종이를 들썩였습니다. 다음 수업이 없는 오후였습니다. 서둘러 강의실을 비워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복도와 책상...

정정수빈 2026-10-01 분 읽기 155 2 2
컬럼/에세이

과제의 순서

노트북 화면 맨 위에서 커서가 깜박이고 있었습니다. 2학기 둘째 주 화요일 오전, 대전의 대학 강의실에서 첫 과제를 설명하는데 몇몇 학생이 내용보다 제목 칸을 먼저 붙들고 있었습니다. 제목이 정해져야 쓸 수 있다는 표정이었습니다. 한 학생은 빈 문서에 두세 글자를 적었다가 지우기를 되풀이했습니다. 저는 제목을 비워 두어도 된다고 말한 뒤, 오늘 수업이 끝난...

정정수빈 2026-09-17 분 읽기 108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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