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쓴 초안
아이디어 상태
🌿 성장 중 (구체화 단계)지난주 화요일 오전, 대전의 대학 강의실에서 빔프로젝터로 과제 제출란을 띄워 둔 채 학생들에게 AI와 함께 만든 초안도 손보지 말고 그대로 내 보자고 말했습니다. 몇몇은 웃었고, 뒤쪽에서는 정말 그래도 되느냐는 표정으로 화면을 다시 보았습니다. AI를 썼는지 숨기고, 저는 문장의 결을 살피며 적발하려는 방식으로는 학생이 실제로 어디에서 멈추는지 알기 어렵다는 생각이 오래 남아, 이번 학기 한 분반의 과제를 처음부터 다르게 내 본 것입니다.

초안 파일에는 AI에게 던진 질문과 받은 문장, 그중 지운 대목까지 남기게 했고, 제출할 글에는 자신이 무엇을 왜 고쳤는지 두세 문장만 적게 했습니다. 처음 받아 본 파일에는 매끈한 문장이 예상보다 많았고, 기록란에는 어색해서 고쳤다거나 내 말처럼 바꾸었다는 설명이 되풀이되었습니다. 이것이 사용 과정을 드러내는 일인지, 또 하나의 검사표를 만드는 일인지 저도 확신하기 어려웠습니다. 감시의 칸만 늘리는 셈일 수도 있으니까요. 아직은...
이 문장은 내가 아는 일이 아닌데 너무 그럴듯해서 지웠다.
한 학생이 남긴 이 문장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무엇을 가져왔는가보다 무엇을 믿지 않았는지, 자기 경험과 맞지 않는 문장을 어떤 근거로 밀어냈는지를 물을 수 있었고, 그제야 첨삭할 자리가 생겼습니다. 저는 원고 옆에 왜 그럴듯했는지, 아는 일과 아는 듯한 문장의 경계는 어디였는지를 짧게 적었습니다. 평소라면 완성된 글의 어휘나 문단 연결을 먼저 보았을 텐데, 이번에는 삭제된 문장이 대화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다음 과제부터는 남길 기록을 더 작게 정해 볼 생각입니다. 기록이 길어지면 학생도 저도 설명을 꾸미게 되고, 세 분반의 파일을 읽는 동안 정작 문장을 놓칠 수 있어서입니다.
- 처음 요청한 말
- 가져온 문장
- 끝내 고친 문장
AI가 쓴 문장 자체보다 그 문장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기로 한 순간을 읽는 일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학생이 끝내 지운 문장도 과제의 일부로 읽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