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다고노트

누구나 지식과 아이디어를 나누는 공간

컬럼/에세이

돌봄교실 앞에서 들은 말

이
이서연
2026-10-23 09:19 97

“나는 또 남아야 해.” 어제 목요일 하교 뒤, 돌봄교실 앞에서 가방을 멘 민지가 말했어요. 영어학원 차를 기다리던 준호는 곧바로 “나는 영어 하고 태권도도 가”라고 받아쳤고, 두 아이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어요.

처음에는 둘 다 바쁜 일정이 싫다는 뜻으로 들려서 “각자 힘든 게 있지”라고 했어요. 그런데 민지가 입을 다물고 가방 끈만 만지더라고요(복도에서는 이런 손짓이 유난히 잘 보여요). 늦게까지 학교에 있는 걸 놀렸다고 느낀 듯했는데, 제가 너무 빨리 둘을 같은 마음으로 묶었나 싶었어요. 교실로 잠깐 데리고 들어와 누구 일정이 더 나은지는 말하지 말고, 그날 제일 기다리는 시간과 제일 피곤한 시간을 하나씩 말해 보자고 했어요. 준호는 태권도 끝나고 만화 보는 시간, 민지는 돌봄교실에서 퍼즐 하는 시간은 괜찮다고 했어요. 피곤한 시간을 물었을 때는 둘 다 한참 생각했고요.

비슷한 일이 생기면 먼저 달래기보다 “그 말이 어떻게 들렸어?”를 물어보려고 해요. 말다툼은 잦아들었지만 민지는 나갈 때도 준호보다 반걸음 뒤에 있었어요. 그 반걸음이 자꾸 남네요.

이서연

페다고노트 작가

구독자 0 게시글 19
이서연

댓글 2개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한
한지우 2026-10-23 10:10

민지가 나갈 때도 반걸음 뒤였다는 대목이 남습니다. 다음 날 두 아이는 평소처럼 이야기했나요?

이
이서연 2026-10-23 13:16

다음 날 아침엔 먼저 서로 말을 걸었고, 쉬는 시간에도 함께 놀았습니다.

다른 게시물

강의를 다시 켜는 조건

강의를 다시 켜는 조건

지난 화요일 아침, 출근 셔틀에서 봄에 사 둔 데이터베이스 강의를 다시 열었습니다. 재생 목록의 네 번째 영상이었습니다. 처음 산 주에는 퇴근 뒤 두 편씩 봤습니다. 진도도 따로 적었습니다. 이미 아는 도입부가 생각보다 길었고, 어느 날부터 재생 목록을 닫아 뒀습니다. 이어서 볼 이유가 없었던 셈입니다. 월요일에 주니어 한 명이 느린 조회 쿼리를 같...

by 박지훈

중2 성적표 앞에서 제가 급해졌습니다

지난 토요일 오전, 인천 집 식탁에서 중2 아들이 중간고사 성적표를 내밀었습니다. 저는 종이를 받아 들자마자 수학 점수부터 짚었습니다. “학원 숙제는 다 한 것 맞니”, “이 점수로 괜찮겠니”가 거의 붙어서 나왔습니다. 아들은 잠깐 성적표를 보더니 물을 마시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걱정해서 한 말이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점심을 ...

by 윤도현

두 시간의 저장창

침대 옆 충전기에서 패드를 뽑았다. 교육학 인강 켜기 전에 진짜 한 판만 하려고 했다. 목요일 점심 전이었고, 집 책상엔 노트도 펴놨다. 시작할 때만 해도 저장창 한 번 보면 끌 수 있을 줄 알았다. 근데 저장 화면이 뜰 때마다 이제 끄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음 구간 문이 열리는 장면이 너무 궁금했고, 장비 하나만 바꾸고 가자던 게 보스전까지 가고, 보스...

by 최우진

명절 표를 먼저 봤다

지난주 금요일 이브닝 끝무렵, 인계 준비로 스테이션이 어수선한데 게시판 쪽만 이상하게 사람이 계속 바뀌었어요. 다음 달 명절 근무표가 붙은 거였어요. 다들 대놓고 몰려가진 않고, 지나가는 척 한 번씩 멈췄어요. 저도 펜 내려놓고 갔는데 제 이름보다 세 번째 신규 이름부터 찾았어요. 찾고 나서 조금 웃겼어요. 예전에는 새 표만 붙으면 내 오프가 며칠인지, ...

by 강하은

겹친 창들

목요일 밤, 화면에 열린 창이 자꾸 하나처럼 보였어요. 애월 집 작업실에서 외주 시안 파일을 닫았다가 3기 과제 창을 열고, 다시 시안으로 돌아왔어요. 같은 회청색을 두 번 골랐고 두 번 다 틀렸어요. 오후부터 외주 수정이 들어왔어요. 미뤄 둔 과제 피드백도 그날까지 보내야 한다는 걸 뒤늦게 다시 봤고요. 식은 커피 위로 모니터의 푸른빛이 얇게 떠 있었어...

by 한지우

칠판 사진을 남기기 시작한 이유

칠판 사진을 남기기 시작한 이유

지난달 목요일 5교시였어요. 2학년 교실에서 결석했던 학생에게 전날 풀이를 다시 설명했는데, 제 공책에는 답만 남아 있어서 칠판에 식을 처음부터 다시 썼어요. 그날부터 지우기 직전 칠판 전체를 한 장씩 찍었어요. 학급 게시판에 올리면 빠진 학생도 따라올 수 있겠다 싶었는데, 며칠 뒤 한 학생이 식이 너무 작고 창문 빛도 비친다고 했어요. 사진을 확대해 ...

by 김민준

페다고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