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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Tag: #에세이

Column/Essay

빈자리의 공기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 복도에서 지나가는 발소리와 멀리서 웃는 소리가 들어왔고, 의자를 끄는 소리는 그보다 가까이에서 자꾸 겹쳤습니다. 9월 첫째 주 월요일 오전, 첫 교양 글쓰기 수업을 시작하기 전이었습니다. 아직 서로의 이름을 모르는 학생들은 휴대폰과 노트를 번갈아 내려다보았고, 나는 출석부를 펼쳐 놓은 채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맨 앞줄 가운데와...

정정수빈 2026-11-01 min read 23 4 3
Column/Essay

남겨 둔 문장

지난주 금요일 늦은 오후, 연구실 책상에서 2분반 김 학생의 수정 원고를 넘겼습니다. 과제 마감 뒤의 첨삭이라 눈이 쉽게 흐려졌고, 같은 문장을 읽고 또 읽어도 뜻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원고에는 단어를 바꾸고, 문단을 옮기고, 다시 처음 표현으로 돌아간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빨간 펜 뚜껑은 자꾸 책상 아래로 굴러갔습니다. 한쪽 여백에서 작은 글씨를 ...

정정수빈 2026-10-28 min read 64 3 3
Idea Note

중간쯤

어제 화요일 늦은 오후, 마지막 수업이 끝난 빈 강의실에서 출석부를 덮으려는데 학생 하나가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서평 초안을 지금 내도 되느냐고, 마감은 남았는데 첫 문장만 자꾸 고치게 된다고 했습니다. 휴대폰 화면을 내미는 학생 앞에서 나는 문장을 읽기보다 그날 세 분반에서 비슷한 질문을 몇 번 들었는지 먼저 헤아렸습니다. 주제를 바꿔도 되는지, 이렇...

정정수빈 2026-10-21 min read 125 2 2
Column/Essay

종이의 무게

화요일 이른 아침, 연구실 책상 한쪽에 놓아 둔 인쇄 과제를 두 팔로 안아 가운데로 옮기다가 종이 더미가 오른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손바닥으로 윗부분을 누르고 아래쪽을 다시 맞췄습니다. 한글날 연휴가 지난 뒤 제출된 세 분반 과제를 어제까지 출력해 둔 것인데, 화면에서는 파일 이름이 세로로 늘어서 있을 뿐이던 것이 종이가 되자 갑자기 부피와 무게를 가졌습니다...

정정수빈 2026-10-13 min read 112 1 2
Column/Essay

저녁 식탁의 말

월요일 저녁, 국 냄비의 불을 줄이고 멸치볶음 접시를 식탁 가운데 놓는데 아들이 숟가락을 든 채 물었습니다. “엄마는 오늘 학교에서 뭐 했어?” 수업하고 과제를 읽었다고, 별일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들은 더 묻지 않고 국에 밥을 조금 말았습니다. 평소에는 내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면 괜찮았다는 말이나 고개 한 번으로 끝내는 아이인데, ...

정정수빈 2026-09-29 min read 124 1 0
Column/Essay

천천히 넘긴 쪽

수요일 낮 열두 시 사십 분쯤, 다음 수업까지 조금 남은 연구실에서 학생의 독후감 한 장을 펼쳤습니다. 종이가 얇아 뒷면의 글씨가 희미하게 비쳤고, 점심 뒤에 마시던 물컵은 책상 한쪽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짧은 글이라 금세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같은 문장을 세 번 되읽었습니다. 문장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학생이 그 대목에 자를 대지 않고 그은 밑줄, ...

정정수빈 2026-09-23 min read 83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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