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오후
몇 해 전 가을 수요일 오후, 마지막 분반의 학생들이 거의 빠져나간 강의실에는 의자를 미는 소리만 잠깐씩 남아 있었습니다. 칠판 한쪽에는 수업 중 고쳐 쓴 문장이 지워지지 않은 채 있었고, 닫히지 않은 창문으로 들어온 공기가 출석부의 얇은 종이를 들썩였습니다. 다음 수업이 없는 오후였습니다. 서둘러 강의실을 비워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복도와 책상 사이가 평소보다 넓어 보였습니다.
가방에 노트북을 넣고 나오는데 김 학생이 복도 벽에 기대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손에는 자기소개서 초안이 들려 있었고, 종이는 한 번 반듯하게 접혔다가 다시 펴진 자국이 났습니다. 첫 문장부터 막혔다며 내미는 종이를 받아 보니 연필로 지운 자리와 검은 볼펜으로 덧쓴 말이 겹쳐 있었습니다. 파일을 보내도 되는데 왜 출력했느냐고 묻자, 화면에서는 고친 자리가 금방 사라져서 싫다고 했습니다. 접힌 종이 위에 무엇을 버렸고 무엇을 남겼는지 표시해 두고 싶다고, 조금 머뭇거리며 덧붙였습니다.
종이는 조용했습니다.
우리는 복도 창가에 서서 첫 문장을 함께 읽었습니다. 성장 과정과 지원 동기와 장점을 한 문장 안에 다 넣으려다 보니, 문장은 길었고 정작 김 학생은 그 안에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디서부터 다시 써야 할지 묻는 학생에게 나는 몇 군데 동그라미를 쳤지만, 곧바로 말을 이어 가지 못했습니다. 자기소개서라는 이름부터 이미 좀 무리한 요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대개 자기를 다 설명하지 못한 채 하루를 보내는데, 정해진 칸 안에서는 망설임까지 단정한 문장으로 바꾸라고 하니 말입니다.
“나는 나를 설명하는 일이 제일 어렵다.”
강사 초년에는 이런 말을 들으면 얼른 답을 적어 주었습니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하면 되고, 이 표현은 빼고, 사례는 앞으로 옮기라고, 빨간 펜이 멈추면 내가 준비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일까 봐 서둘렀던 듯합니다.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졌을까요. 첨삭한 종이를 돌려준 뒤 내가 학생의 문장을 읽은 것인지, 내가 쓰고 싶은 문장으로 바꿔 놓은 것인지 한참을 들여다볼 때가 있습니다. 그날에는 김 학생의 첫 문장 옆에 짧은 물음표 하나만 남겼습니다. 무엇을 잘하느냐보다 언제 가장 오래 머무느냐고 물었고, 김 학생은 종이 아래쪽에 작은 글씨로 무언가를 적었다가 다시 줄을 그었습니다.
복도 끝에서 밀대 통이 끌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김 학생은 종이를 원래 자국대로 접어 가방 안쪽에 넣고 계단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여덟 해 동안 수업이 끝난 뒤의 오후는 대체로 비슷했고, 매번 다른 종이 한 장이 남았습니다. 나는 강의실로 돌아가 창문을 닫고 칠판에 남은 문장을 지웠는데, 그날은 지우개를 털어 두고도 한동안 문을 잠그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