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끝의 자리
수요일 밤, 애월 작업실 모니터에 사과와 흰 접시가 떠 있었어요.
3기 수강생 한 분의 첫 정물 과제였어요. 커피는 이미 식었고, 답글창에는 “잘 그렸어요”라고 적혀 있었어요. 한참 보다가 그 문장을 지웠어요.
오래 본 선
어색한 선도 있었어요. 그런데 먼저 보인 건 접시 가장자리를 끝까지 따라간 눈이었어요. 사과의 붉은 면보다 접시의 타원이 더 조심스럽게 잡혀 있었고, 연필 끝으로 몇 번 고쳐 본 흔적도 남아 있었어요. 완성된 모양보다 그 머문 시간이 더 또렷했어요.
그래서 그대로 적었어요. 접시의 타원을 오래 본 것이 보인다고. 다음에는 접시 뒤쪽 선이 사과에 닿는 자리만 한 번 더 천천히 보아도 좋겠다고요.
답장의 길이
초보 그림에 무엇을 써야 할지 여전히 망설여요. 칭찬이 짧으면 부담이 덜할 것 같고, 설명이 길면 숙제처럼 보일까 걱정돼요. 밤에는 문장이 더 짧아지기도 하고요. 그날도 피곤해서 그냥 닫고 싶었는데…
결과보다 오래 머문 자리 하나, 다음에 볼 자리 하나를 적으니 답장도 조금 길어졌어요. 접시를 세 번 다시 그렸다고 했어요. 제가 본 흔적과 그 사람이 보낸 시간이 맞닿은 셈이었어요.
누군가의 그림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자리는 어디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