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 속 바다
어제 일요일 늦은 오후, 애월 해안도로를 걷다가 늘 지나치던 작은 가게 앞에서 멈췄어요. 보리는 돌담 옆에 코를 붙이고 오래된 냄새를 읽는 중이었고요. 유리창에는 바다 엽서가 여러 장 붙어 있었어요. 희게 번진 파도, 짙은 남색 바위, 한 줄로 곧은 수평선. 기울어진 빛이 유리에 닿을 때마다 바다가 잠깐씩 사라졌어요. 저는 그 앞에서 한참 망설였어요...
어제 일요일 늦은 오후, 애월 해안도로를 걷다가 늘 지나치던 작은 가게 앞에서 멈췄어요. 보리는 돌담 옆에 코를 붙이고 오래된 냄새를 읽는 중이었고요. 유리창에는 바다 엽서가 여러 장 붙어 있었어요. 희게 번진 파도, 짙은 남색 바위, 한 줄로 곧은 수평선. 기울어진 빛이 유리에 닿을 때마다 바다가 잠깐씩 사라졌어요. 저는 그 앞에서 한참 망설였어요...
수요일 밤, 애월 작업실 모니터에 사과와 흰 접시가 떠 있었어요. 3기 수강생 한 분의 첫 정물 과제였어요. 커피는 이미 식었고, 답글창에는 “잘 그렸어요”라고 적혀 있었어요. 한참 보다가 그 문장을 지웠어요. 오래 본 선 어색한 선도 있었어요. 그런데 먼저 보인 건 접시 가장자리를 끝까지 따라간 눈이었어요. 사과의 붉은 면보다 접시의 타원이 더 조심스럽게...
파란 칸 열두 개가 화면에 길게 누워 있었어요. 지난주 화요일 밤, 애월 작업실에서 3기 수강생들의 4주차 과제를 넘겨보다가 커리큘럼 표를 다시 열었어요. 처음에는 기초 선부터 완성작까지 천천히 데려가고 싶어서 12주를 꼭꼭 채웠거든요. 빈칸이 있으면 덜 가르치는 것 같기도 했고요. 그런데 중간부터 과제를 밀린 화면이 자꾸 남았어요. 피드백을 길게 쓸수록 ...
토요일 오전이었어요. 현관문을 열자 납작한 상자가 발끝에 닿았어요. 서울 출판사 이름이 찍힌 송장을 보고도 한참동안 들지 못했고요. 최근 외주 원고가 또 왔나 싶어 주말까지 모른 척할까, 잠깐 진지하게 생각했어요. 테이프를 길게 뜯으니 봄에 그린 그림이 실린 동화책이 나왔어요. 편집자님의 짧은 메모도 한 장. 견본이라는 두 글자를 보고서야 어깨가 풀렸어요...
목요일 밤, 화면에 열린 창이 자꾸 하나처럼 보였어요. 애월 집 작업실에서 외주 시안 파일을 닫았다가 3기 과제 창을 열고, 다시 시안으로 돌아왔어요. 같은 회청색을 두 번 골랐고 두 번 다 틀렸어요. 오후부터 외주 수정이 들어왔어요. 미뤄 둔 과제 피드백도 그날까지 보내야 한다는 걸 뒤늦게 다시 봤고요. 식은 커피 위로 모니터의 푸른빛이 얇게 떠 있었어...
문을 열자마자 작업실에 걸어 둔 얇은 종이들이 평소와 반대쪽으로 들썩였어요. 바람 소리는 창틀 모서리에 얇게 걸려 있었고요. 사각사각. 종이끼리 비비는 소리. 다시 들어가 창문을 볼까 했는데 보리가 먼저 현관턱을 넘었어요 수요일 오전의 골목은 익숙한데 바람만 낯설었어요. 늘 바다 쪽에서 오던 바람이 오늘은 등 뒤에서 밀었거든요. 보리도 평소 가던 쪽으...
자정이 넘어서야 외주 스케치를 멈췄어요. 화면을 오래 본 눈이 따끔거려 태블릿을 뒤집어 두고, 작업실 창문을 손가락 두 마디쯤 열었어요. 낮보다 낮고 긴 파도 소리가 틈으로 들어왔어요. 검은 유리에는 책상과 내 얼굴만 희미하게 떠 있었고요. 바깥은 보이지 않는데 물결은 자꾸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 아니 그냥 피곤해서 그렇게 들렸는지도... 발치의 보리는 귀...
“설명은 알겠는데, 어디부터 고쳐야 할지 더 어려워졌어요.” 지난 금요일 밤, 애월 작업실에서 이 선생님의 답장을 다시 읽었어요. 선의 방향과 명암을 길게 적을수록 정확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고칠 순서까지 한꺼번에 흐려진 모양이었어요. 태블릿 화면을 켰어요. 인물 드로잉 위로 제 손이 움직이는 모습을 녹화했어요. 푸른 화면빛만 책상에 남고 식은 커피는 꽤 ...
지난 목요일 밤, 애월 집 작업실에 과제 창만 푸르게 떠 있었고, 미제출 이름 옆에 써 둔 개인 메시지를 한 줄씩 지웠어요. 3기 첫 주에는 마감 전날마다 이름을 확인했어요. 그림이 아니어도 괜찮고, 점 하나라도 올려 달라고 따로 보냈죠. 제출칸은 조금씩 찼어요. 그런데 윤 선생님이 급히 그린 빈 스케치를 올린 뒤 늦어서 미안하다는 답을 남겼는데, 제가 기...
화요일 점심 무렵, 김 선생님의 과제 아래에 답글을 길게 썼어요. 선이 자꾸 끊기는 이유와 손목 각도, 다시 그릴 때 먼저 볼 곳까지.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나니 손은 꽤 바빴는데 제 그림은 한 줄도 없었어요. 조금 웃겼어요. 창가의 태블릿은 검은 화면 그대로였어요. 보리는 그 앞 바닥에 배를 붙이고 잠들어 있었고요. 커튼 틈의 희끗한 빛이 등 위에서 천...
화요일 아침, 아홉 시가 조금 넘어서야 붓 몇 자루를 싱크대로 가져갔어요. 어젯밤 마지막 답글을 쓰고 그대로 물통에 꽂아 둔 것들. 붓대에는 마른 물감이 얇게 붙어 있었어요. 물을 두 번 갈았어요. 헹굴 때마다 바닥에 가라앉은 파랑이 조금씩 옅어졌어요. 창으로 들어온 빛도 물 위에서 잘게 흔들렸고요. 물통 가장자리에 남은 가느다란 파란 테두리. 수강생에게...
지난 화요일 아침, 보리가 산책줄을 입에 문 채 현관 앞에 앉아 있었어요. 잠깐만, 하고 연한 커피를 내렸어요. 창밖 바다는 아직 흐린 은색. 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도 반쯤은 서서 마신 첫 잔이었어요. 두 번째 잔은 외주 시안의 인물 눈썹을 고치며 마셨어요. 세 번째 잔에서는 입꼬리를 조금 내렸고요. 손은 계속 움직이는데 표정은 자꾸 처음 자리로 돌아왔어...
지난 목요일 밤, 애월 작업실에서 3기 과제 창을 열다가 최 선생님 그림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 뻔했어요. 답글 첫 줄에 성까지 썼다가 지웠어요. 커피잔 옆에서 커서만 깜박였고요. 처음엔 제출 순서와 얼굴을 같이 외우면 될 줄 알았어요. 첫 번째 칸, 두 번째 칸, 프로필 사진. 낮에는 제법 맞는데 밤 열한 시가 넘어가면 이름이 슬쩍 자리를 바꿨어요. 과제는...
“태블릿 펜은 어떤 걸 써야 하나요?” 지난 기수 첫 수업이던 토요일 오후, 애월 집 작업실 채팅창에 박 선생님의 질문이 올라왔어요. 종이 한 장 예전 같으면 펜촉 차이와 앱, 종이 종류를 먼저 설명했을 거예요. 실제로 그랬고요. 화면에는 구매 링크를 묻는 채팅이 오래 남았어요. 도구가 없는 분은 시작도 못 한 듯 조용해졌고, 좋은 펜을 준비한 분도...
지난 화요일 밤, 애월 작업실 화면에서 이 선생님의 손이 자꾸 사라졌어요. 종이를 돌려 보이려다 카메라 밖으로 빠졌고, 채팅창도 잠깐 조용해졌어요. 멈춘 선 다른 수강생들은 그 손을 기다리며 자기 그림까지 멈췄어요. 저도 화면을 바로잡는 동안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나 망설였고요. 책상 위 스탠드 빛만 종이를 희게 눌렀어요. 처음 두 기에는 라이브가 길수록 ...
토요일 점심 무렵, 애월 작업실 책상에서 김 선생님의 인물 드로잉을 열었어요. 3기 피드백 창 옆에는 식은 커피가 있었고, 손은 자꾸 태블릿 펜으로 갔어요. 눈 위치에 비해 턱이 조금 길어 보였거든요. 예전 같으면 새 레이어를 만들었을 거예요. 눈썹과 코끝, 턱 아래에 가로선을 긋고 제가 맞다고 생각한 턱선을 진한 색으로 얹었겠지요. 빠르고 친절해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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