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평가 기준을 먼저 읽은 시간
지난주 목요일 5교시, 교실 뒤쪽에서 손이 하나 올라왔어요. 평가표를 나눠 준 직후였는데, 무엇을 써야 근거를 잘 제시한 건지 묻더라고요. 근거를 잘 제시함. 제가 만든 문장이었는데 바로 답하기 어려웠어요. 채점할 때는 알 것 같았지만 쓰는 학생에게는 꽤 흐린 말이었어요. 예전에 박 선생님이 해 준 조언이 떠올랐어요. 기준을 학생이 쓰는 말로 바꿔 보...
지난주 목요일 5교시, 교실 뒤쪽에서 손이 하나 올라왔어요. 평가표를 나눠 준 직후였는데, 무엇을 써야 근거를 잘 제시한 건지 묻더라고요. 근거를 잘 제시함. 제가 만든 문장이었는데 바로 답하기 어려웠어요. 채점할 때는 알 것 같았지만 쓰는 학생에게는 꽤 흐린 말이었어요. 예전에 박 선생님이 해 준 조언이 떠올랐어요. 기준을 학생이 쓰는 말로 바꿔 보...
지난 화요일 오후, 판교 사무실 자리에서 S님 화면을 같이 봤습니다. 개발환경 문서의 중간쯤이었습니다. 설치는 거의 끝났는데 다음에 뭘 확인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문서는 길었습니다. 명령어와 캡처도 충분했습니다. 어디까지 되면 첫 실행이 끝난 것인지, 권한이 없으면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지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맨 위에 붙인 문장 기...
수요일 1교시, 받아쓰기 10급을 연습하던 아이가 공책의 빈칸을 오래 바라봤어요.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열 문장을 쓰게 했더니 두세 글자 뒤부터 연필은 자꾸 멈췄고, 지우개 가루만 늘어났어요. 기다리면 다시 쓰겠지 싶었는데 표정까지 굳는 걸 보고서야 공책을 잠깐 가져왔어요. 보이는 문장을 줄였어요 공책을 반으로 접어 오늘 쓸 세 문장만 보이게 했어요. ...
“선생님, 아직 가방도 안 열었어요.” 오늘 목요일 아침 자습 시간, 아이들이 자리에 앉기 전에 그림책을 펼쳤다가 첫 몇 쪽을 거의 소란 속에서 넘겼어요. 의자 끄는 소리와 지퍼 여는 소리 사이로 제 목소리도 자꾸 끊겼고요. 책을 읽는다기보다 교실 소리에 문장을 얹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7월 첫째 주부터 아침 자습 10분에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도 비슷했어...
회색 목이 돌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아서 어제 수요일 아침, 교문 앞에서 걸음이 멈췄어요. 학교 뒤 하천 가장자리였어요. 왜가리 한 마리가 물만 보고 있었는데 부리 끝도 거의 움직이지 않더라고요. 처음엔 버려진 우산인가 했어요. 저는 시험지 봉투를 든 채 난간 옆에 섰어요. 봉투 모서리가 손바닥을 자꾸 눌렀고, 들어가야 하는데 조금 더 보고 싶었어요. ...
화요일 점심 무렵, 김 선생님의 과제 아래에 답글을 길게 썼어요. 선이 자꾸 끊기는 이유와 손목 각도, 다시 그릴 때 먼저 볼 곳까지.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나니 손은 꽤 바빴는데 제 그림은 한 줄도 없었어요. 조금 웃겼어요. 창가의 태블릿은 검은 화면 그대로였어요. 보리는 그 앞 바닥에 배를 붙이고 잠들어 있었고요. 커튼 틈의 희끗한 빛이 등 위에서 천...
지난주 금요일 이브닝, 병동 스테이션에서 세 번째 신규가 보호자 전화를 받기 전 메모를 한참 봤어요. 첫 문장을 속으로 고르는 게 보였고, 입술만 몇 번 움직였어요. 저는 옆에 붙어 있으면 더 긴장할 것 같아서 두 걸음쯤 떨어져 있었어요. 괜히 말을 보태지 않았어요. 사실 저도 뭘 기다리는 사람처럼 컴퓨터 화면만 넘겼고요. 통화는 생각보다 길지 않았어요. ...
어제 방과 후 2학년 교실에 혼자 남았어요. 창가 첫째 줄 책상에 상담 자료를 펼쳤는데, 성적표와 수행평가 기록이 금세 한가득이었어요. 처음엔 많이 준비하면 덜 빠뜨릴 줄 알았어요. 막상 학생 한 명을 떠올리니 말할 순서가 흐려졌고, 점수 칸만 번갈아 보게 되더라고요. 박 선생님께 복도에서 자료를 한번 보여드렸어요. 상담은 자료 설명보다 아이 모습을 같...
“분명히 여기에 풀을 넣어 뒀는데.” 금요일 2교시 쉬는 시간, 교탁 아래 서랍을 반쯤 빼 놓고 색연필 통과 자를 하나씩 꺼냈어요. 풀은 안 보이고 뚜껑만 두 개 나왔고요 (도대체 짝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다 서랍 맨 뒤에 납작하게 끼어 있던 작은 봉투 하나가 손끝에 걸렸어요. 봉투 안에는 지난해 우리 반 아이가 접어 준 종이별 편지가 들어 있...
“아빠, 라면 두 개 먹자.” 지난주 금요일 밤, 야근을 마치고 인천 집에 들어오니 중2 아들이 주방 문 앞에서 말했습니다. 아내와 딸은 먼저 잠든 뒤였고, 저도 저녁을 건너뛴 터라 냄비부터 꺼냈습니다. 밤늦게 두 개는 많지 않으냐는 말은 물을 받은 다음에야 떠올랐습니다. 평소 같으면 공부는 했느냐, 게임은 얼마나 했느냐부터 물었을 겁니다. 그날은 아들이...
지난 월요일 오전, 판교 사무실에서 C님과 배치 작업의 수동 재실행 방법을 찾았습니다. 슬랙 검색창에 작업명, 장애 문구, 담당자 이름까지 바꿔 넣었습니다. 이십 분이 넘어가자 C님이 물었습니다. “찾으면 이 질문은 어디에 적어야 하나요?” 팀 위키를 같이 열었습니다. 빈 메뉴가 몇 개 있었고, 2년 전 화면 기준으로 적힌 문서도 있었습니다. 운영, 배치...
지난주 화요일 오전, 남동공단 회사 회의실에서 박 사원 앞에 거래처 전화번호를 적은 메모를 놓았습니다. 입사 석 달째인 박 사원이 견적 납기를 묻는 전화를 직접 걸었고, 저는 옆자리에서 듣기만 했습니다. 첫 인사가 조금 빨랐고 제품 번호를 확인할 때는 목소리가 작아졌지만, 통화는 무사히 끝났습니다. 제가 먼저 답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신입이 들어...
어젯밤 집 책상에서 조선 후기 호적 자료 해설을 읽었다. 이름 옆에 손가락을 걸어 둔 채 몇번이나 앞쪽으로 돌아갔다. 누구는 새로 적히고 누구는 빠졌다. 한 집 안에서도 기록되는 방식이 달랐다. 문제집 설명보다 그 부분을 오래 보고 있었다. 한 문단만 더 읽으려다가 왜 이런 기록을 남겼는지, 종이 밖에는 또 누가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실제로 살았는데 이...
지난주 월요일 데이 근무 전, 병동 스테이션에 체크리스트를 펼쳐 놨어요. 인계 준비하는 선생님들한테 종이를 건네며 물었어요. “이 칸은 실제로 언제 확인해요?” 처음 만든 체크리스트는 제가 신규에게 매일 설명하는 일을 순서대로 적은 종이였어요. 설명했으면 표시하고, 한 번 보여 줬으면 확인받는 식이었죠. 그 정도면 빠뜨릴 일이 줄어들 줄 알았는데요. 막...
물병 뚜껑을 닫고 정상 벤치 옆에 서서 한참 눈을 가늘게 떴습니다. 어제 일요일 오전, 계양산 아래로 펼쳐진 풍경에서 남동공단 쪽을 찾아보는데 제가 방향을 제대로 짚은 것인지는 조금 자신이 없었습니다. 낮은 지붕과 길이 붙어 있어 생각보다 조용하고 작게 보였습니다. 평일에는 납기 전화 한 통, 수정 견적서 한 장에도 공장들이 아주 크게 느껴집니다. 그 안...
지난주 목요일 오후, 판교 사무실 작은 회의실에서 J님과 API 권한 코드를 보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질문이 끊겼습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편하게 물어보세요.” J님은 알겠다고 했고 화면은 그대로였습니다. 이해했는지 물으니 괜찮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어디를 봐야 하는지는 바로 답하지 못했습니다. 질문이 없다고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질문을 만들...
지난주 금요일 이브닝, 준비실 카트 위에 수액 세트와 알코올 솜을 놓고 세 번째 신규에게 교체 순서를 보여줬어요. 제가 먼저 한 번, 신규가 바로 한 번. 순서는 맞았고 저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어요. 예전에는 거기까지 하면 됐다고 생각했어요. 한 번 보여주고, 한 번 해보고, 옆에서 한 번 더 지켜보면 확인 끝. 체크리스트에도 수행이라고 표시하기 좋았거...
“태블릿 펜은 어떤 걸 써야 하나요?” 지난 기수 첫 수업이던 토요일 오후, 애월 집 작업실 채팅창에 박 선생님의 질문이 올라왔어요. 종이 한 장 예전 같으면 펜촉 차이와 앱, 종이 종류를 먼저 설명했을 거예요. 실제로 그랬고요. 화면에는 구매 링크를 묻는 채팅이 오래 남았어요. 도구가 없는 분은 시작도 못 한 듯 조용해졌고, 좋은 펜을 준비한 분도...
지난주 금요일 6교시, 담임반 교탁 위에 짧은 확인 문제를 펼쳐 뒀고, 채점을 마치고 보니 같은 식에서 빨간 표시가 여러 번 겹쳤어요. 조금 답답했어요. 평소처럼 오답 노트를 내라고 하면 풀이를 통째로 옮기는 아이가 많아요. 정답은 반듯하게 남는데, 어디서 막혔는지는 잘 안 보였어요. 베껴 쓰는 손만 바빠 보일 때도 있었고요. 그래서 그날은 오답 아래...
이번 주 수요일 오전, 학생들은 두 사람씩 마주 앉아 서로의 첫 문단을 낮은 목소리로 읽었습니다. 수업 시작 십여 분을 비워 두고, 화면에 올린 과제가 아니라 미리 출력해 온 종이를 펴게 했습니다. 과제를 받자마자 첨삭을 시작하면 문장이 모니터 안에서는 지나치게 매끈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조사도 맞고 문장부호도 제자리에 있는데, 무엇을 말하려는지는 오래 ...
“선생님, 준비물이 색종이인가요, 색연필인가요?” 화요일 저녁, 칠판 알림장을 찍어 학급 안내에 올린 지 얼마 안 돼 학부모님 한 분이 물으셨어요. 올릴 때는 제법 잘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사진을 확대하니 글자 끝이 흐렸고, 아이들이 그려 둔 작은 그림과 자석에 가린 부분도 있었어요. “확인해서 다시 말씀드릴게요”라고 답한 뒤 같은 내용을 찾느라 저도 잠깐 ...
지난 토요일 오후, 거실 시계만 자꾸 봤어요. 소파에 앉은 건 점심 전이었고, 잠깐 쉬려던 참이었어요. 아침에는 평소처럼 하천을 뛰어 5km를 채우고 돌아와 바로 샤워했어요. 수건까지 널 때는 하루가 길 줄 알았어요. 수행평가 기록을 정리해야 했고 다음 주 수업 자료도 봐야 했는데, 노트북은 충전선만 꽂힌 채 식탁 위에 그대로 있었어요. 휴대폰을 ...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지난주 나이트 인계 직전, 병동 스테이션에서 세 번째 신규가 그렇게 말하고 멈췄어요. 손에는 확인표가 있었고, 빠진 칸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고 있었어요. 주변은 인계 준비로 바빴고 저는 시계를 먼저 봤어요. 제가 바로 한 말은 “왜 지금 알았어요?”였어요. 이미 얼굴이 굳어 있던 신규는 그 뒤로 더 짧게만 대답했어요. 무엇이 빠졌...
문제집을 잠깐 덮어 보자고 했어요. 지난 화요일 아침 자습 시간이었어요. 평소보다 조용한 2학년 교실이었어요. 아이들은 틀린 문제만 다시 붙잡고 있었고요. 첫 지필평가를 앞둔 날이라 “잘 봐”라는 말부터 나올 뻔했어요. 입 안에서 한 번 멈췄어요. 그 말은 응원은 되지만, 시험지를 받은 뒤 할 일을 알려 주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첫 장을 받으면 이름부터 ...
“떡볶이 먹고 갈래요?” 지난주 목요일, 종례가 끝나고 교실 바닥의 색종이 조각을 줍고 있는데 김 선생이 문 앞에서 물었어요. 둘 다 가방을 멘 채 학교 근처 분식집까지 걸어갔고, 창가의 두 사람 자리에 나란히 앉았어요. 떡볶이와 튀김(김말이와 오징어)을 시켜 놓으니 그제야 퇴근한 것 같았어요. 휴대전화에는 오후에 온 학부모 메시지가 남아 있었어요. 아이...
“마지막 커밋이 언제죠.” 지난 목요일 저녁, 판교 사무실 스터디가 끝난 뒤 K님과 각자 학습용 저장소를 열었습니다. 둘 다 한 달 전이었습니다. 날짜가 나란히 찍혀 있어서 조금 웃었습니다. 끝나지 않는 할 일 K님 저장소에는 인증, 알림, 관리자 화면이 남아 있었습니다. 제 README도 비슷했습니다. 실제 서비스처럼 만들겠다는 문장만 길고, 실행되는...
지난 토요일 저녁 여덟 시쯤, 인천 집 거실에서 중2 아들의 게임 화면과 벽시계를 번갈아 보았는데, 약속한 시간이 지났다고 말하자 아들은 한 판만 더 하면 된다고 했고, 저는 그 한 판이 도대체 몇 분이냐고 따졌습니다.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습니다. 처음에는 회사 영업팀에서 하듯 시간을 정해 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일에는 몇 시까지, 주말에는 몇 시간...
어제 종례가 끝난 뒤, 교실 바닥에 의자 끄는 소리만 잠깐 남았어요. 아이들이 놓고 간 공책 몇 권을 교탁 위에 가지런히 쌓고 알림장을 적으려는데 칠판 한쪽의 받아쓰기 날짜가 눈에 들어왔고, 아직 금요일 오후인데 다음 주가 갑자기 바로 앞까지 온 것 같았어요. 지우개를 들었어요. 날짜는 그대로 두었어요. 알림장에는 준비물부터 쓰면 되는데 월요일 1교시 장...
지난 토요일 오후, 동네 그림책 서점 문을 밀고 들어가니 작은 의자 하나가 비어 있었어요. 조카에게 줄 책 한 권만 고를 생각이었는데, 가방을 내려놓을까 하다가 그냥 멘 채로 책장 앞에 섰어요. 처음 꺼낸 건 짙은 파란색 표지였고, 그다음은 주황색 고양이가 그려진 책이었어요. 몇 권만 훑어볼 참이었는데 시계를 다시 봤을 때는 두 시간 가까이 지나 있었고요....
"번역기 있는데 왜 영어 배워요?"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려고 애쓴 기록입니다. 도구가 대신해 주는 것과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을 아이들과 함께 구분해 봤습니다.
수업 끝에 칠판을 지우지 않고 사진으로 남겨 다음 날 첫 화면으로 띄웁니다. 어제의 오답이 오늘의 출발점이 되면 아이들은 틀리는 것을 덜 두려워합니다. 3년째 하고 있는 작은 습관을 적었습니다.
도구 사용법을 가르치는 연수는 도구가 바뀌면 낡습니다. AI 시대의 교사 연수는 '이 버튼을 누르세요'가 아니라 '내 수업에서 무엇을 AI에게 맡기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스스로 정하는 연습이어야 합니다.
수업에 AI를 들여도 시험이 그대로면 학생은 시험에 맞춰 공부합니다. 정답을 재는 평가에서 과정과 판단을 재는 평가로 옮겨 가야 하는 이유와, 교실에서 당장 시도해 볼 수 있는 평가 형태를 정리했습니다.
학생마다 다른 속도, 다른 설명, 다른 문제. AI 튜터가 약속하는 맞춤형 학습은 분명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맞춤'이 '편안함'이 되는 순간 학습은 멈춥니다. 맞춤형 학습이 잘 작동하려면 무엇이 더 필요한지 생각해 봅니다.
AI 교육이라고 하면 프로그래밍부터 떠올리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AI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쓰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코드가 아니라 의심하는 습관, 확인하는 습관, 자기 말로 다시 쓰는 습관입니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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